질문
질문하기- 예술의 역할에 대해 언급하셨는데, 예술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예술의 역할을 규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술에 대해 가르쳐주신 교수님께 혼날 것 같습니다. 앞서 '역할'이라고 언급했다면 '예술의 기능 중 하나'라고 정정하고 싶습니다. 마찬가지로 제 배움이 짧아 예술이 뭔지 정의하기도 상당히 조심스러운데, 저는 1. '개인에게 진리라고 생각되는 것의 표출 (또는 개인이 진리라고 인식함)' 2. '강력한 전달력을 가지는 아름다운 형식' 두 조건이 맞아떨어졌을 때 예술로 여겨진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조건이 누락되면 상업적 행위가 될 것이고, 두 번째 조건이 누락되면 예술이라 인정받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 두 조건의 교집합으로 인해 발생하는, 제가 주목하는 기능은, 기존 사회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무너뜨리는 강력한 창이 되어 준다는 것입니다.
- 수용을 합리적인 가치라고 생각한다면, 형법이나 범죄의 문제에 있어서는 강경한 교화주의 입장이신가요? 엄벌주의에 대한 의견이 궁금합니다.
저는 교화주의가 합리적이라는 것에 상당히 동의하지만, 엄벌주의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숙고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에서 우리는 선악의 구분이나 정의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하고 사유할 여유가 없기에 특정한 수준에서 자신만의 기준을 가져야 합니다.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정의롭다는 믿음을 어느 정도 필요로 합니다. 사법 규칙의 복잡성이 개인이 편하게 인지할 수 있는 규칙의 범위를 넘어서게 되면, 사법 불신이 강화되어 정치적 반발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엄벌주의는 직관적인 정의의 집행으로 강하게 체감되는 효과가 있기에 섣불리 벗어나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특정 사회가 관철할 수 있는 정의'의 영역은 스펙트럼이라고 보고, 점진적으로 확장해야 할 대상이지 이상론으로 갑자기 확장하려 하면 더 큰 부작용에 부딫혀 더 느리게 확장하게 되거나 오히려 퇴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는 엄벌주의에서 교화주의로의 이동은 사회 구성원의 '정의'에 대한 합의가 진전하는 속도를 고려하며 적당한 속도를 유지하며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합의를 전진시키기 위해서는 법을 바꾸는 것 보다, 사회 구성원의 법학에 대한 이해도 강화 또는 법률 지식에 대한 접근성 강화와 같은 실천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AI의 영향으로 인해 '학습 소득'을 통한 재정적 재분배가 불가피해진 상황에서, 인간의 '유한함 수용'을 긍정하는 태도가 민주주의적 의사결정 역량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감당 가능한 수준의 비효율성'을 보장하는 구체적인 조건은 무엇입니까?
민주주의가 얼마나 '감당 가능하게 비효율적인지 판단하는 것'은 그 사회의 정치적 의사결정의 역량이 얼마나 근시안적인지가 중요한 지표로 작용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수용을 긍정하는 태도 그 자체가 비효율성이 감당 가능할 수준을 유지하도록 보장해주지 않으며, 둘은 상당히 다른 축의 논의이다. 민주주의를 지켜내자는 나의 주장은 수용보다도 실존주의적 명제에 더 기반하고 있으며, 수용은 "인간 이성의 비효율성을 상정하더라도 인간이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게 하기 위해서는 '좋은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결론에서 동원된다.
- 학습소득의 기준은 무엇인가?
학습 소득의 기준이 될 '학습'은 어떤 경험을 통해 그 사람이 원래 갖고 있던 지식과 신념보다 확장된 지식을 얻게 되었는가? 이다. 이를 실용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은, 그 사람이 갖고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지식 수준에서 대답할 수 없었을 것이라 여겨지는 질문의 예상 정답률이 얼마나 증가했는가이다. 이는 현재 정확하게 측정하기 거의 불가능하다. 내가 이를 위해 준비하려는 기술은 Knowledge Tracing이라는 방법론이 정형화된 문제 풀이 기록을 넘어 다양한 맥락과 상호작용의 종류에 대응할 수 있도록 확장하는 방법론이다. 한편, 이 학습소득에서 측정할 '유용한 지식을 얻었는가'를 판단하기 위해 유용한 지식을 정의해야 할텐데, 이는 사회의 합의에서 도출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로서는 교육과정 개정 논의가 이 과정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 학습 소득이라는 개념이 다소 갑작스럽게 제시되었습니다. 부연 설명을 주세요.
저는 유튜브 영상을 시청하거나 교육적인 게임을 하는 등, 다양한 배움의 형태를 모두 권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배울 기회'의 경쟁자는 '이미 갖춘 신념만으로 설명되는 편하고 매력적인 세계' 이기 때문에 배움도 아주 친근한 형태로 제시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가장 효과적인 것은 해당 기회에 대한 보조 재원 지급입니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정치적 양극화, 필터 버블을 극대화하도록 학습된 것은 플랫폼, 컨텐츠 크리에이터, 미디어 소비자 모두가 '사용자가 원하는 것을 보여준다'는 동기를 공유하며 재정적 이해관계도 맞기 때문입니다. 이 강력하게 수렴된 결과물을 극복하려면 규제가 아니라, '좋은 컨텐츠'에 대한 재정적 지원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침 이제 AI로 인한 일자리 상실 문제가 가시화될것으로 보입니다. 인위적으로 일자리를 보존하기 위해 기술을 규제하는 대신, 빠르게 재원 분배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학습 소득은 '학습을 매개하고 학습의 발생을 입증할 데이터를 제공한 플랫폼', '학습을 수행한 개인', '학습을 일으킨 컨텐츠를 생성한 사람' 모두에게 분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점점 더 노동보다 배움에 시간을 투자해도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아직 기술이 받혀주지 않아 제가 주장한 수준의 학습 소득은 불가능하겠지만, 유사한 개념으로 학습 바우처 정책이나 장학 시스템이 있으니 완화된 형태로 도입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 개인의 수용을 지탱할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에 대해 반복적으로 언급하셨는데, 기본 소득을 주장하시는 건가요?
절반만 맞습니다. 매우 길어질 것 같은데, 저는 우선 AI의 특이점 돌파로 인한 일자리 감소로 인해 '국가의 재정적 재배분'이 불가피해질거라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 배분의 기준으로, 저는 '학습 소득'을 주장합니다. 그 이유는 기본소득의 형태로만 자원을 배분했을 때, 사회 구성원의 개인 수준에서 자신의 기존 신념과 합치하는 정보들이 제공할 달콤한 좁은 세계의 늪에서 벗어날 동기가 부재하기 때문에 민주주의적 의사결정 역량이 붕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여전히 인간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사회'를 원한다고 했었죠. 그렇기에 민주주의는 지켜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사회 구성원의 역량'은 개발해야 합니다. 인간의 의사결정이 AI에 비해 '감당 가능할 수준으로만' 비효율적이어야 인간의 의사결정 권한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능력 없는 민간인들이 억지로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국가는 시장과 자본에게 모든 의사결정을 맡긴 국가에게 무력으로 정복당하겠죠. 따라서 시민의 역량 강화가 아주 중요한 국가적 과제가 될 것이고, 저는 이것을 재정적으로 지원하여 '학습이 이루어질 때' 재원을 지급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다소 TMI지만 제가 학습과학으로 박사 학위 진로를 잡은 것은 그 정책의 기준이 되는 '지식의 정량적인 정의와 측정 방법'을 개발하기 위해서입니다. 처음에 반만 맞았다고 한 것은, 이 정책이 결국 '사회가 옳다고 여긴 지식을 획득하는 행위'만을 금전적으로 보상할 것이기에, 그 사회가 장려하지 않는 가치를 날카롭게 제시하는 역할을 해주는, 기존의 예술이 실용적으로 맡던 역할을 맡기기 위해 어느 정도의 기본 소득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유동적이지 못한 사회는 고인 물이 썩듯이 썩을 것입니다. 따라서 기본 소득에 대한 저의 의견을 정리하자면, "학습 소득으로 대부분의 자원의 분배를 수행하면서도 최소한의 기본소득은 필요하다" 입니다. 지금 제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위기 의식대로라면, 정말 생계만 지탱가능할 정도의 최소한의 금액만 지원하고 조금의 사치적 요소를 위해서는 학습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 개인이 자신의 이해의 틀을 바탕으로 내린 모든 결정이 합리적이라는 전제 하에, 그 결정이 제3자의 시각에서 비효율적일 때, 그 비효율성을 수용하는 것이 개인의 합리적 판단 원칙과 어떻게 정합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까?
우리 모두는 각자가 살아온 인생의 최고의 전문가라는 생각을 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인간의 뇌가 주어진 일련의 경험으로부터 당시에 동원가능한 자원을 바탕으로 국소적 최적해를 만드는 장치라고 생각하면, 타인의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의사결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비효율성을 수용하는 것이, 스스로도 한정된 자원으로 사고하는 존재라는 것을 더 강하게 인식하게 만들어 수용 기제의 합리성을 체화하는데 더 기여할 것 같습니다.
- 재정적 안정성 믿음의 조건은?
개인이 일상적으로 연상하는 불안의 수준을 고려했을 때, 그 불안 중 경제적 이유로 발생하는 것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춰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1. 불안이 적을수록 좋다 2. 경제적으로 안정적일수록 좋다 일 것입니다. 1번이 다소 모호한데, 저는 '돈이 있으면 해결 가능한 문제의 범위'는 지수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상상력이 꽤 풍부한데, 아주 낮은 확률로 전 지구적 재난이 일어났을 때 그 위기를 극복하려면 어느 정도의 재력이 필요할지 상상해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걸 '불안'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순간, 재정적 안정성에 대한 믿음을 위해 필요한 재력은 무한하게 늘어날 것입니다. 따라서 '일상적으로 도저히 간과할 수 없는 위험'의 범위가 줄어들수록 유리합니다. 이 지점에서 그나마 제 수용 철학을 변호하고 싶은데, 유한함에 대해 긍정하는 태도가 물리적 위협에 대한 막연한 불안을 상당히 정도 해소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필연적으로 죽음이 예견되어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가 무던히 노력해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움켜쥐려 해도 언젠가는 손아귀에서 흘러나갈 것을 이해하고 그럼에도 아름다운 삶이었다고 사랑하게 된다면, 갑자기 운석이 떨어지거나 핵전쟁이 일어나는 것에 대한 불안은 경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죽음이 해악이 아닌데도 투쟁을 경시하는 것이 후회될 조건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각자의 기질에 따라 다를 것 같습니다. 각자 가장 소중한 것이 다르고 '죽음이 해악이 아니다'도 스스로의 득실에 둔감한 저의 개인적인 특성 때문에 더 빨리 긍정할 수 있던 철학적 선언이라고 생각합니다. 후회될 조건은 각자 민감한 것에 의존할 것 같습니다. 저의 경우엔 사회적 가치 지향성이 아주 높은 것 같습니다. 충분히 오래 관찰하며 생각해보았지만, 같은 양의 고통을 제가 겪는 것보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겪는 것이 더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기질을 갖는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 차라리 거리를 두고 싶어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이 '언제 후회할지'에 초점을 두고 무엇을 위해 투쟁해야 할지 정하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수용과 투쟁이 대립할 때 항상 수용을 우선시함'이라는 핵심 명제를 삶의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적용할 때, 투쟁을 '취미에 가까운 수준의 능동성'으로 제한하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의 구체적인 경계선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의 '수용적 태도'가 현실적 요소를 얼마나 완충할 수 있는지에 따라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신선과 같은 이상적 수준에 이른 수용적 태도를 이미 갖추었다면, 환경이 존재에 대한 위협을 가하더라도 그 위협을 피상적으로 느끼고 수용을 관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충분히 유한함을 긍정하지 못한 상황에서 투쟁을 취미로만 억지로 여긴다면, 현실적 의미에서의 투쟁을 소홀히 하여 확보하지 못한 자원이 초래한 위협에 크게 좌초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한함을 '물리적 실체로서의 죽음' 정도까지 확장해보면 조금 더 직관적입니다. 애초에 실존적 질문에 대한 것이니까요. 저는 물리적인 죽음에 크게 연연하지 않지만 '저작물을 통해 기억됨으로써의 존재의 영원성 확보'와 같은 대안들에 의존합니다. 제 수용의 수준에서는 생명의 위험과 같은 대가가 따르는 '투쟁의 경시'는 감당할 수 있으나 그보다 더한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면 감당하지 못하고 후회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인지하고, 예견하고, 대응할 수 있는 사회적 문제를 경시하다가 대응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면 크게 후회할 것 같습니다. 이렇듯 절대적인 구체적 경계선은 없고, 개인의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라고 답하겠습니다.
- 재정적 안정성이라는 일상적 제약이 '유한함을 사랑하는 공리'와 충돌할 때, 어떤 조건에서 그 제약이 개인의 기질적 선택을 제한할 수 있는가?
기질을 뛰어넘는 가혹한 환경이라고 답할 것 같습니다. 안타깝지만 아무리 부처같은 기질을 타고난 사람도 가난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을 겪을 때 아무 대처도 할 수 없는 상황을 겪는다면 트라우마를 얻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현실적 제약은 인간의 의지와 이상론적 지향성을 아득히 압도할 수 있습니다.
- 과반을 넘어 다수의 사회 구성원이 수용적 태도를 훌륭하게 습득하면, 누가 생산적인 활동을 하나요? 자신에 대한 수용적 태도가 생산성과는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여기서 제가 이런 주장을 하는 배경이 언급되어야 합니다. 저는 이제 '노동'이 개인이 세상에 개입하는 본질적 창구를 하고 있던 마르크스의 시대에서 벗어나 '생산적이기에 노동하는 것이 아닌'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즉, AI가 인간의 많은 생산활동을 대체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에서 이야기합니다. 인구의 필수재 수요를 부양할 기본소득은 제공할 수 있는 사회를 기대합니다. 사실 AI가 다 먹여살리면 '수용하거나 말거나 딱히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이 예상되는데, 저는 '그럼에도 인간은 스스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지켜내야 하기 때문에' 수용이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인식하는 현대 사회의 가장 큰 위험은 경제적 위기가 아닌, '인간의 주권 상실' 입니다. 수용이라는 원칙의 함의는 '인간의 이성이 성공할 조건을 훨씬 제한적으로만 긍정하자'라는 것 입니다. 저는 제가 합리적이지 않은 상황이 합리적인 상황보다 훨씬 많음을 이해하고 있기에, 저의 이성이 실패하더라도 실패를 보완할 수 있는 시스템을 준비하는 것이 여유로울 때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비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는 수용의 원칙에 더해, '인간은 환경적 위협의 해소에 본인이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추어야 한다'라는 원칙을 내세워 앞으로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합니다. 정치적 양극화의 실패 사례처럼, 개인의 이성이 실패하더라도 사회가 무너지지 않으면서도 개인이 마음먹으면 불합리한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 '인간의 유한함을 사랑하는 공리'와 '재정적 안정성'이라는 일상적 제약이 충돌할 때, 어떤 원칙이 우선되어야 합니까?
아주 씁쓸한 질문인데, 사회적 안전망이 효용성(utility) 없는 인간에게 제공하는 기회가 적은 지금으로서는 개인의 기질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고 하겠습니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을 기꺼이 감당할 기질이라면 유한함을 사랑해보길 권장하겠지만 절대 다수의 사람에게는 재정적 안정성을 추천할 것 같습니다.
- 본인이 해결 가능한 크기의 문제 해결을 통한 성취감 증진이 도덕적 자아를 강화하는 원칙과, 그리고 굳건한 애착이 없는 존재 긍정 추구가 맹목적 강화될 우려가 있다는 원칙이 충돌할 때, 어떤 원칙을 우선해야 합니까?
그런 원칙이 충돌하는 의사결정 상황은, 굳건한 애착도, 튼튼한 자아 효능감도 존재하지 않은 사람의 상황일 것 같습니다. 그럴 때 저는 우선 효능감의 회복을 권장할 것 같습니다. 결국 외부 개입을 상정하는 상황일텐데, 효능감의 회복은 일을 시키거나 게임을 시키는 비교적 저비용의 감독 비용으로 집행할 수 있지만 굳건한 애착을 제공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효능감을 회복하여 건실한 사회 구성원이 되었을 때 애착을 형성할 솔루션을 제공하는 방향을 선택하겠습니다. 다만 만약 AI가 아주 발달해서 개인에게 절대적인 정서적 지지를 제공할 수 있는 솔루션이 나온다면 전자를 먼저 권장할 의향이 있습니다.
- 성취의 긍정적 효과를 누리면서도 과몰입하지 않기 위해, 환경적 요인에 대한 인지와 함께라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또 다른 일상적 조건은 무엇입니까?
'일상' 이라는 제약이 아주 중요합니다. 현실에서는 현실적 불안을 대표하는 가장 큰, '재정적 안정성'이 개인의 믿음 수준에서 충족되어야 합니다. 각자가 자연스럽게 걱정하는 위기 중 재정적으로 불안할 때 대응하기 힘든 요소들에 대한 대비를 고려되어있어야 성취가 생존 투쟁의 양상을 띄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재정과 관련된 점은 인간이 살면서 항상 한계 효용이 변화하기 때문에 필요한 만큼 벌다보면 끊임없이 금전에 휘둘리는 삶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리 사회 초년생때, 스스로의 성격과 생활 특성을 고려해 '나는 이 정도 금액을 벌면 행복할 것 같다' 라는 목표치를 정해두고 그 목표치를 안정적으로 초과달성할 수 있다는 안전한 믿음을 획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제 사례는, 저는 대학 졸업 전에 취업을 해서 당시 4인가구 중위소득을 상회하는 소득을 받았습니다. 한편 제 기질은 아주 무던하기 때문에 바퀴벌레와 동거하는 세면대 없는 하숙방이나, 고시원에서 사는 삶에도 잘 적응할 수 있었고 저는 제가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금액은 지금 월급의 1/3이며, 대학원을 가거나 창업을 해서 아무리 앞으로 커리어가 꼬여도 지금 받아봤던 초봉의 절반은 받지 않을까? 라는 낙관적인 생각으로 경제적인 고민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제 '무조건적 수용'이라는 개념은 현재로서는 '기질적으로 재정에 대한 낙관적인 관점이나 낮은 기대를 갖는 사람'이나, '이미 재정적으로 꽤 안정된 사람'에게만 현실적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사회 안정망의 확보를 통해 이 개념이 사회 전반에게 권장할만한 개념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습니다.
- 자아의 본질을 '고유한 약점'에 대한 수용으로 삼는 원칙과, '잘 설계된 환경에서 즐거운 성취를 누리는 것이 마음 건강에 긍정적으로 기여한다'는 원칙이 충돌할 때, 어떤 원칙을 우선해야 하는가?
두 언급이 같은 맥락에서 같은 결로 나온 문장인데 어떨 때 충돌한다는 건지 잘 감이 안오네요. 그런 사례를 생각해보자면, '난 약점에 대한 이해니 포용이니 고민하는 것보다도 내가 활약할 수 있는 손쉬운 문제들이 좋아' 라는 태도로 게임이나 특정 현실의 문제에 열중하는 사람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전자를 우선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음 건강을 회복하라는건 건강이 무너졌을 때에 한시적으로 해당하는 조언이지 회복된 이후에도 계속 단기적 즐거움에만 빠져있어도 된다는 제안이 아닙니다.
- 신체적 건강 개선을 통한 '인지적 자원 여유'가 '수용적 태도'의 유지에 기여하는 구체적 조건은 무엇입니까?
스스로 사유 끝에 얻은 결론이든, 습득한 지식이든, '스스로의 단점'을 사랑해야겠다는 동기를 갖게 되었을 때 여유가 수용으로 이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스스로의 단점을 극복해낸다는 스포츠의 고전적인 근대적 목적으로 건강을 개선하면 오히려 악영향을 미칠 것 같네요.
- 자아의 본질을 '고유한 약점'에 대한 수용으로 삼을 때, 이러한 본질적 수용이 외부적 성취의 긍정적 효과를 누림과 충돌하지 않으면서도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일상적 조건은 무엇입니까?
그 조건은 '잘 설계된 환경에서 즐거운 성취를 누리는 것이 우리 마음의 건강에 긍정적으로 기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의지대로 효능감과 우울감을 능동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스스로에게 그런 기회를 제공할 때, 수용적 태도를 갖춘 사람은 성취의 긍정적 효과를 누리면서도 과몰입(=성취를 자신을 긍정하는 가치로 여기는 마음)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일상의 작은 성취를 통한 자기효능감 증진이 '수용을 우선시하는 태도'를 유지하는 데 있어, '진정성'의 관점에서 볼 때로는 '외부적 성취'에 대한 집착으로 변질될 위험을 막는 구체적인 조건은 무엇입니까?
질문의 문장력이 다소 난해하네요. 일단 레퍼런스로 삼은 글을 추측해보겠습니다. - '일상 성취를 통한 효능감 증진이 수용을 우선시하는 태도를 유지한다': 효능감이 불안을 해소해서 수용에 기여하는 측면을 의미한 것 같은데, 원문은 관계를 그리 단순화하게 설명하지 않았을 것 같네요. - 진정성(authenticity): 개인의 고유함과 본질에 대한 용어? - '외부적 성취에 대한 집착으로 변질': 변질되는 주어는 '효능감 증진'인 것 같은데, 아마 효능감 증진에 대한 우려를 인용한 것 같네요. 따라서 다시 질문을 제가 이해한 바대로 써보자면, " 개인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진정성의 관점에서 이야기해보고 싶네요. 일상의 성취를 통한 자기효능감 증진이 외부적 성취에 대한 집착으로 변질될 수 있으며, 수용적 태도가 이를 막을 수 있다고 하셨는데 그 방어가 성공할 조건을 Authenticity의 측면에서 설명해주시겠어요?" 라고 이해하고 답하겠습니다. (여전히 난해하지만요) 저는 자아의 본질은 기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우리에게 다양한 '상처'들을 남기기도 하며 고유함을 부여하죠. 우리는 각자의 경험들에 누적된 어떠한 비합리성이나 비효율성이 있고 그것이 개인의 진정한 본질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고유한 약점'을 숨기고 '여러 성취에 둘러싸인 자랑스러운 나'를 스스로의 정체성으로 여길 때, 고유의 아름다움을 지닌 자신은 가려지고 타인의 시선이 구성한 바람직한 나로 포장된다고 생각합니다. '단단한 수용의 기반'은 여기서 효능감 증진이 피상적인 수준에서 정신 건강 회복에 기여하는 긍정적 효과만 누리하고, 나아가 자아의 핵심 요소로 둔갑하는 것은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소한 성취가 나에게 즐거움과 행복은 줄 수 있어도 나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앎에서 도출된 수용적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 자신의 유한함을 인지하고 긍정하는 수용적 태도가 자아의 일관성을 깊이 탐구하고 외재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셨는데, 이러한 수용이 '어떤 조건'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자아의 일관성 탐구로 이어질 수 있습니까?
수용하려는 시도가 실패하는 상황을 사례로 드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스스로를 오롯이 긍정하기로 결심하고 스스로에게 달콤한 환경을 물리적으로 허용하는 것에만 그치는 경우, 본질적인 수용에 다가서지 못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라는 추상화된 개념을 긍정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가 용서하지 못하는 가치가 본인 내부에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 인식하고 그것을 직시하며 긍정하는 경험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 사유 없이 달콤함에만 머물면 자기연민 가득한 나르시시스트가 될 우려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수용은, 자신을 돌보고 긍정하는 물리적 환경 조성을 넘어 '스스로의 유한함' 그 자체를 직시하고 포용하는 사고와 경험으로 이어져야 본질적이며 그 조건에서 자아의 일관성 탐구로 이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 정신적 건강이 확보되어 '지적인 사치'가 가능한 상태가 될 때, '수용을 우선시하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개인의 인격적 동일성(Personal Identity)을 유지하는 데 있어 어떤 구체적인 조건적 정당성을 갖게 됩니까?
인간의 유한함은 각 개인의 고유함과 맞닿아있기에 본인이 갖고 있는 유한함을 인지하고 긍정한다는 수용적 태도는 스스로의 고유함이 어떤 조건에서 발생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직시할 때 스스로의 자아의 일관성도 더 깊게 탐구할 수 있고, 문서화 등을 통한 외재화에도 더 솔직하게 응할 수 있을 것이다.
- '해결 가능한 범위로 문제를 인식하려는 인식론적 태도'가 '인간의 유한함을 극복하려는 시도'라는 투쟁의 동기적 측면과 충돌할 때, 일상에서 어떤 태도를 우선시해야 합니까?
자신의 효능감 회복을 위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더 좁은 범위로 문제를 인식하려는 태도와 유한함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충돌할 때, 현재 상태의 여유에 맞게 판단해야 합니다. 만약 지금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강력한 불안이 존재하고 그걸 온전히 인식하면 혼자서 극복할 수 없는 규모의 문제라면, 더 좁은 범위로 인식을 제한하는 시도가 더 우선이 될 것 같습니다. '유한함을 극복'하려는 투쟁적 태도가 진정으로 최선의 시야에서 문제를 해결하는데 기여하기 위해서는 균형잡힌 정신적 건강 상태가 필수이므로 회복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인지적으로 여유로운 상황이라면 인식을 제한하는 것은 단지 유흥일 뿐이기에 투쟁을 더 강조할 것 같습니다.
- 만약 어떤 상황에서 '수용이 수반될 때' 능동적 선택이 가능하다는 주장과 '수용이 수반되지 않을 때'는 선택이 어렵다는 주장이 동시에 참이라면, 의사결정 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어떤 선택 기준이 가장 합리적인가요?
우선 저는 인간의 이성적 능력에 대한 아주 제한적인 가능성만을 긍정하기 때문에, 상당히 결정론적인 시각을 갖고 있고, 따라서 제가 생각하는 합리성과 의사결정이론의 합리성은 아주 거리가 있습니다. 저는 어떤 지적 시스템이 특정 상황에서 내린 모든 결정은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이 지금까지의 결정을 일반화하여 최선을 다해 구축한 이해의 틀로, 최선의 판단을 하는 것이니 그것이 제 3자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비효율적이더라도 합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질문이 뭘 묻는지 모르겠네요. 두 주장이 모두 참일때 대립하지 않는데 왜 무엇이 더 합리적인지 묻는거죠?
- 본질적 불안을 포용하는 것이 최고의 지식이라는 원칙과, 신체적 건강이 인지적 자원 및 자기효능감을 통해 사회적 안정성을 높인다는 원칙이 충돌할 때, 어떤 원칙을 우선해야 합니까?
개인의 정신 건강 상황이 건강하면 전자를, 아니면 후자를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자는 결국 불안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을 때 체화 가능한, 지적인 사치의 성향이 강하므로 일상적 조건에서는 우선 건강한 정신과 몸을 회복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 '존재를긍정받기 위한 과제를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믿음이, '수용이 수반되지 않을 때 존재를 긍정받기 위한 과제를 능동적으로 선택하기 힘들다'는 주장과 충돌할 때, 어떤 원칙을 우선해야 합니까?
오독한 것 같은데, 두 주장은 충돌하지 않습니다. 전자의 전제조건이 '수용이 수반될 때' 존재를 긍정받기 위한 과제를 선택하는 행위가 능동적인 선택의 영역이 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명제는 각각 수용이 수반될 때와 수반되지 않을 때에 대한 정합적인 주장입니다.
- 개인의 신체적 건강을 관리하는 것이 개인의 삶을 넘어 사회적 시스템의 안정성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까?
신체적 건강은 두 가지 효과로 이어질 것 같다. 1. 의사결정에 동원 가능한 인지적 자원이 많아짐. 건강해지면 일단 여유가 생긴다. 물론 운동으로 인해 교감신경이 지나치게 활성화된 상태라면 인지적 자원이 줄어든 상태라고 볼 수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건강이 개선된다면 만성적인 스트레스 관리에 긍정적일테고 자원의 여유도 생길 것 같다. 개인의 자원이 늘어날수록 합리적 의사결정을 할 확률이 높아지고, 사회 전체의 안정성도 증가할 것이다. 2. 자기효능감의 회복. '달성할만한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것'에 대한 우려를 표출한 이전 글도 있지만, 효능감이 약하여 불안과 우울함이 큰 상황의 사람에게는 긍정적 효과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 당장 체감되는 불안이 해소되어야 수용에 대한 이성적 접근을 위한 여유가 확보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두가지 주요 경로를 통해, 건강을 관리하면 사회 자체의 안정성도 높아질 것이다.
- 성취에 따른 조건부 긍정적 피드백이 반복되는 일상적 상황에서, 아이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좋은 삶'을 구성하는 요소 중 어떤 부분을 훼손하고 있습니까?
'좋은 삶'에 대한 개인적 생각부터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좋은 삶이란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하며, 그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국소적인 '행복한 상태'는 '존재에 대한 불안이 해소된 상태'라고 할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인식이 유한하기 때문에 때때로 충족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행위나 계획, 의사결정 등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은총알처럼 여겨지는 고양감에 잠시 도취될 수 있습니다. 그 짧은 시간동안 우리는 불안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부모님이나 연인, 반려동물의 품에 안겨 모든 근심이 해소된 것 같은, 그 순간 나와 대상의 관계와 상태가 세상의 전부가 된 것 같은 상황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 순간도 행복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효능감을 느낄 수 있도록 잘 설계된 게임이나, 알코올과 같은 향정신성 약물을 통해 인식의 범위를 제한함으로써 행복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행복한 상태'를 상정할 수 있습니다. 좋은 삶이란, 개인의 인식 가능한 최대의 범위에서 볼 때, 이런 행복한 상태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행복하지 않은 상태에 대한 불안이 높으면 불행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모든 것이 긍정적이고 만족스러운 기질을 가졌고, 적당히 좋은 환경을 제공해주며 많은 시간과 사랑을 주는 주인을 만나 자라는 골댕이라는 이름의 골든 리트리버의 삶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골댕이의 삶은 좋은 삶일 것 같습니다. 먼 미래에 대한 지나친 걱정도 없으며 내일이 행복할 것이라고 굳게 믿을 수 있습니다. 비록 현실적으로 자신의 환경이 갑자기 변했을 때 이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 비해 상당히 결핍되어있으나, 골댕이는 스스로 이를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편안히 제 명을 다하고 주인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눈을 감슴니다. 저는 골댕이의 삶을 좋은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좋은 삶'을 생각해보면, 아이가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한다는 압박에 계속 시달릴 때, 두 요소가 좋은 삶의 가치를 훼손합니다. 첫째는 증명에 대한 불안이며, 둘째는 외부환경에 대한 의존성이 유발할 잠재적 위험입니다. 첫째는 다소 자명하니 둘째를 기술하면, 골댕이의 사례에서는 평탄한 삶을 전제했으나 만약 주인이 아주 나쁜 사람으로 바뀌거나, 열악한 환경에 갇히면 급속도로 우울해질 것입니다. 이처럼 그 아이의 효능감은 환경이 그 조건을 제공했기에 유지 가능했습니다. 통계적 관점에서 이 의존성은 행복할 확률을 낮춥니다
- 존재의 긍정과 능력 증명이 강하게 연관되어 외부 환경에 의해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이 주장이, 회의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존재를 긍정받기 위한 과제'를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믿음의 정당성을 어떻게 제한하거나 혹은 지지합니까?
수용과 투쟁 도식은 인간 이성에 대한 회의를 채택하되, 근대성을 누적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희망을 제시하는 것이 목표기에 회의주의와 많은 결을 함께 한다. 특히 '존재를 긍정받기 위한 과제를 능동적으로 선택 가능하다'는 명제에 대해서, 나는 우선 '어떤 우리의 지향적 행위가 존재를 긍정받기 위한 것인지 인식하는 것' 이라는 출발점 자체가 높은 수준의 수용에 기반하지 않았을 때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존재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최선이라고 판단하는 행위조차, 그저 나의 자기만족을 위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지했다면 그 존재적 불안과 화해하지 않은 상태의 사람은 큰 불안에 휩싸여 우울과 불안에 휩싸이거나, 그 인식을 부정하고 해결 가능한 문제를 전체 세계에 대한 문제로 표상해버릴 것이다. 따라서 개인이 건강한 정신 상태를 유지한다는 전제로 보면 수용이 수반되지 않을 때 존재를 긍적받기 위한 과제를 능동적으로 선택하기 힘들다. 반면 굳건한 수용이라는 조건 하에서는 그 믿음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상적인 수용'이 현실적으로 도달 가능한 것인지가 논쟁적일 수 있으나, 이상론적 이분법이 아닌, 수용 또한 스펙트럼으로 보면, 보다 능동적으로 해당 행위를 채택할 수 있는 주체적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일상에서 '해결 가능한 문제'에 대한 집착이 '유한함을 긍정하는 태도'와 충돌할 때, 이 충돌을 인식하고 수용하는 것이 덕 윤리적 관점에서 볼 때 어떤 성격적 성향을 갖추어야 합니까?
의무론적 관점보다는 덕 윤리와 '수용'의 기제가 더 상관관계가 높은 것 같다. 눞은 수용적 태도가 수반할 것으로 기대되는 성격적 성향은 다음과 같다. 1. 도덕적 의사결정을 할 확률이 높다. 추후 설명하겠지만, 나는 현대 사회가 갖춘 도덕에 대한 합의가 개인의 영역에서도 장기적 관점에서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근시안적이거나 비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할 유인이 줄어든 상태에서는 보다 이 도덕을 준수할 확률이 높다. 2. 타인에 대해 포용적이게 된다. 결국 인간은 자신과 타인에 대한 가치 판단의 회로를 공유하는 부분이 있기에 (개인의 SVO에 따라 양상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자신에 대한 높은 수용적 태도를 갖추었을 때 타인에게도 그 관대함을 적용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3. 전반적으로 동원가능한 인지적 자원이 늘어난다. 크게 보면 첫번째 이유와 중복될 수 있지만, 의사결정에 사용할 인지적 자원이 늘어날수록 우리가 통상적으로 '덕'이라 부르는 가치를 추구할 여력이 많아진다고 생각한다. 이외에도 여러 성향적 특성이 발현될 수 있으나, 아직은 사변적인 견해인 상황이다.
- '인간의 유한함을 사랑하는 공리'와 '해결 가능한 문제에 대한 집착'이라는 태도가 충돌할 때, 어떤 원칙이 우선해야 합니까?
핵심적인 질문입니다. 제가 각각 '수용'과 '투쟁'이라 부르는 개념에 대응됩니다. 수용은 그 정의 그대로고, 투쟁은 좀 더 정확히는 조금 더 넓게 정의된, '인간의 유한함을 극복하려는 시도'입니다. 저는 '수용과 투쟁이 대립할 때 항상 수용을 우선시함'이 합리적이고 타당한, 제 철학의 핵심 도덕적 명제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투쟁을 추구하더라도, 현재 자신이 그 문제 해결에 동원할 수 있는 자원 (인지적 자원을 포함하여)을 긍정적으로 인지하지 않으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제약을 받습니다. 인간의 인식이 '위협을 해소 가능한 수준의 문제로 표상하려는' 지향성 때문에 왜곡되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대상을 '위협'으로 인식할수록 문제에 대한 인식이 왜곡될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오히려 투쟁, 즉 문제 해결 행위 자체가 수용을 우선시했을 때보다 비합리적이게 됩니다. '실제 문제를 인식'하는 대신 '자기의 신념체계가 표상하는 문제 공간에 머무는' 투쟁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계속 수용이 수반되지 않는 투쟁에 자원을 많이 할애할수록, 우리의 인지는 이를 정당화하고 싶어하기에 더더욱 수용을 달성하기 힘들어집니다. 따라서 수용 기반을 튼튼하게 다지고, 취미에 가까운 수준의 능동성으로 투쟁하는 태도가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 성취감을 통한 자기효능감 형성이 도덕적 자아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존재의 불안을 해소하는 '굳건한 안정 기반'이 의무론적 관점에서 볼 때 어떤 구체적인 도덕적 의무를 이행하는 조건으로 간주되어야 합니까?
우선, 수용과 투쟁 프레임워크는 의무론에 정면으로 대항합니다. 인간은 제한된 인지적 역량을 지니기 때문에 항상 도덕적 의무를 다할 수 없는 존재이며, 우리가 의무(=사회 또는 장기적, 거시적 수준에서 합리적이라고 보이는 의사결정)라고 여기는 것은 특정 환경 조건 또는 당시의 인지적 자원이 의무 준수를 허용할 때에만 충족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통상적인 의무론적 관점과 잘 호응함을 보이기 위해 설명해보자면, 굳건한 안정 기반이 갖추어지면 우리는 불안에 의해 견인되는 비합리적 의사결정에 의지할 확률이 감소합니다. 굳건한 안정 기반은 행동경제학의 시스템 1vs 시스템 2 구도에서 시스템 2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장치로, 보다 합리적인 이성적 추론이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에 대한 준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도덕적 의무가 합리적임을 인지하면서도 위반하는 주요한 이유가 자신에게 아주 중요하고 긴박하다고 인식되는 위험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 위험에 대한 인식이 과장되어 왜곡되지 않도록 방지해주는 안정 기반은 의무 준수를 위한 좋은 준비물 중 하나입니다.
- 성공한 부모가 특정 성취 시에만 관심을 보일 때, 아이가 평생을 매여 살게 되는 상황에서, 아이가 스스로 능력을 증명하는 행위 자체를 긍정적으로 내면화하지 못하게 만드는 구체적인 심리적 기제는 무엇입니까?
일단 수용과 투쟁은 전문적인 심리학적 이론을 기반으로 뒷받침되는 주장이 아니라, 아직은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프레임워크 단계임을 명시하고 싶다. 아이가 스스로의 능력을 증명하는 과정을 '존재를 긍정받기 위한 과제'로 여기게 될 때, 아이는 그 과정을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피동적으로 견인당하게 된다. 인지의 깊은 수준에서 존재의 긍정과 능력의 증명을 강하게 연관시키기 때문에, 외부환경이 자신이 능력을 증명하기 힘든 상황에 도달할 경우 쉽게 무너질 수 있다.
- '어떤 조건에서도 존재를 긍정받을 것이라는 믿음'이 굳건하지 않을 때, 특정 조건에서만 존재가 긍정받는다는 생각이 강화되는 것이 일상에서 마주치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발현되는지 예시를 들어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이론적 근거보다는 경험에서의 일반화인데, 성공한 부모님이 바쁘셔서 특정 성취를 보였을 때에만 시간과 관심을 보이며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는 상황에서, 아이는 스스로 능력을 증명하는 것에 자신도 모르게 평생을 매여 사는 경우를 많이 본 것 같다.
- n을 개별 노드에 따라 다른 형태로 유연하게 정의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이 유연한 정의가 대규모 시스템의 안정성 예측에 어떤 종류의 구체적인 제약이나 변수를 추가로 요구하는지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노드마다 n, 즉 각 관리자가 제대로 관리할 수 있는 인력의 수나 업무의 범위를 모델링하는 것이 얼마나 정교한가가 과제로 남을 것 같다. 그 역량이 기질적인지, 경험에 따라 성장하는지, 성장한다면 어느 정도의 러닝커브를 보이는지 등등 고려해야할 게 복잡한 시뮬레이션이다.
- 소규모 조직의 '한 리더가 말단까지 감독할 수 있는' 특성을 대규모 시스템에 적용할 때, 'n 계층까지 관측 가능하다'는 제약 조건에서 'n'의 구체적인 정의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n은 2이상의 적당한 자연수로, 한 감독자가 관측할 수 있는 최대 노드의 수 또는 노드의 위계를 의미한다. 이 n을 개별 노드에 따라 다른 형태로 유연하게 정의할 수 있겠지만, 정의를 아예 하지 않는다면 n을 무시할 수 있는 환경인 소규모 조직에서 얻은 결론이 대규모 시스템에서 작동하지 않을 상황을 적용 전 검토 단계에서 놓칠 수 있다.
- 본질적 불안을 포용하는 태도가 가장 합리적이라는 주장이,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해결 가능한 문제'에 대한 집착과 같은 구체적인 상황에서도 일관되게 적용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해결 가능한 문제에 대해 집착하는 태도' 라는 기술을 보면 두 가지를 유추할 수 있다. 하나는 '해결 가능한 범위로 문제를 인식하려는 인식론적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집착' 이다. 전자에 대해서는, 본질적 불안을 포용하려는 태도, 수용 기제는 의사결정자가 내포한 본질적 불안을 긍정함으로써 인식론적 강박을 해소하는데 기여한다. 또 문제를 해결하려는 동기가 불안과 같은 부정적 감정에 의해 주도되지 않으면 후자도 피동적으로 무의식에 의해 집착하는 것이 아닌 능동적으로 문제 해결을 선택하는 긍정적 태도를 갖출 수 있다. 따라서 수용은 해결 가능한 문제를 더 정확하게 인지하게 만들어줌과 동시에 인간이 능종적인 의사결정자의 지위를 회복할 수 있게 돕는다.
- 소규모 커뮤니티의 자원 관리 및 운영 원리를 대규모 분산형 자율 조직(DAO)의 거버넌스 알고리즘에 적용한다면 어떤 점을 반영해야 합니까?
조심해야 할 점은 기존 소규모 조직의 특성으로 인한 편향일 것 같다. 또 일반적으로 규모에서 오는 차이가 있는데, 소규모는 말단까지 전부 한 리더가 감독할 수 있지만 대규모 시스템에서는 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한 노드는 자신 아래의 n 계층까지 관측 가능하다는 식의 제약을 두고 일반화해야 할것이다.
- 인간의 유한함을 사랑하는 공리로 본질적인 실존적 불안에 대처하는 것과 조건 없는 존재 긍정이 각각 어떤 상황에서 더 우선적으로 적용되어야 할까요?
조건없는 존재 긍정을 추구할 수 있는 상황이면 후자가 더 편리하다. 그러나 대체로 우리는 안정형 애인도, 골든리트리버를 키울 재력과 여유도 없기에 전자를 채택하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다.
- 개인이 애착을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구체적인 노력은 무엇이며, 그 노력의 과정에서 어떤 조건이 필수적인가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는 사랑을 받는 것. 서로의 단점마저 사랑하는 연애를 경험하거나 변함없이 사랑해주는 골든 리트리버를 반려동물로 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두 번째는 이성적인 노력으로, 인간의 유한함이 인간의 가장 고유하고 아름다운 요소임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의 유한함을 사랑하는 공리로 본질적인 실존적 불안에 대처할 수 있다.
- 애착이 굳건하지 않을 때, 특정 조건에서만 존재가 긍정받는다는 생각이 강화되어 특정 행동지향적 신념에 집착하게 되는 이유에 대해 어떤 관점이 추가되어야 할까요?
먼저 이 주장이 참인지 과학적인 검증을 요구하는 관점이 필요하며, 개인이 어떤 노력을 통해 애착을 회복할 수 있는지 고민되어야 한다. 애착이라는 용어는 기존 심리학의 애착과 혼동을 유발하므로 자기 수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 굳건한 애착이 제공되지 않을 때 근대적 이상에 대한 추구가 맹목적으로 강화될 우려가 있다는 주장에 대해, 애착이 왜 중요한지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애착(attachment)는 심리학에서 통용되는 맥락보다 내가 다소 넓게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나의 의도는 '어떤 조건에서도 존재를 긍정받을 것이라는 믿음'을 애착으로 정의한다. 이 믿음이 굳건하지 않으면 우리는 특정 조건에서만 존재가 긍정받는다는 생각이 강화되어 특정 행동지향적인 신념에 강하게 집착하게 되고, 그것이 지나친 근대성의 발현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이다. 우리는 조건 없이, 즉 나약하고 유한한 인간의 본질 그 자체를 수용하는 태도가 기반이 되어야 균형잡힌 관점으로 정보를 인식하는 합리성도 회복할 수 있다.
- 개인이 일상에서 작은 규칙이나 일일 퀘스트 같은 사소한 목표를 완수하는 행위가 도덕적 자아를 형성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합니까?
도덕적 자아를 강화하는데 기여할 것 같다. 본인이 해결가능한 크기의 문제를 해결하고 성취감을 얻는 경험이 반복되면 긍정적인 자기효능감 형성에 도움이 되고 이는 근대적인 도덕성을 긍정하는 기반이 될 것으로 보인다. 사람이 의지로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믿음을 강화하니까. 다만 이 과정에서 굳건한 애착이 함께 제공되지 않는다면 근대적 이상에 대한 추구를 맹목적으로 강화할 우려가 있을 것이다. 존재의 불안에 대한 해소로 굳건한 안정 기반을 형성해야 부정적인 우려가 적을 것이다.
- 일상적인 생활 기술이나 소소한 집안 수리 능력이 한 개인의 자존감이나 삶의 질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합니까?
도덕적 자아를 강화하는데 기여할 것 같다. 본인이 해결가능한 크기의 문제를 해결하고 성취감을 얻는 경험이 반복되면 긍정적인 자기효능감 형성에 도움이 되고 이는 근대적인 도덕성을 긍정하는 기반이 될 것으로 보인다. 사람이 의지로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믿음을 강화하니까. 다만 이 과정에서 굳건한 애착이 함께 제공되지 않는다면 근대적 이상에 대한 추구를 맹목적으로 강화할 우려가 있을 것이다. 존재의 불안에 대한 해소로 굳건한 안정 기반을 형성해야 부정적인 우려가 적을 것이다.
- 조건 없는 존재 긍정을 추구하는 상황에서, 굳건한 애착이 제공되지 않을 때 근대적 이상 추구가 맹목적으로 강화되는 구체적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도덕적 자아를 강화하는데 기여할 것 같다. 본인이 해결가능한 크기의 문제를 해결하고 성취감을 얻는 경험이 반복되면 긍정적인 자기효능감 형성에 도움이 되고 이는 근대적인 도덕성을 긍정하는 기반이 될 것으로 보인다. 사람이 의지로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믿음을 강화하니까. 다만 이 과정에서 굳건한 애착이 함께 제공되지 않는다면 근대적 이상에 대한 추구를 맹목적으로 강화할 우려가 있을 것이다. 존재의 불안에 대한 해소로 굳건한 안정 기반을 형성해야 부정적인 우려가 적을 것이다.
- 본인이 생각하는 최선의 지식은 무엇인가요?
나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유한함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태도가 가장 합리적이라고 믿어. 행동경제학과 최신 심리학의 발견은, 우리가 근대성, 즉 정의나 성장 따위의 가치를 추구하더라도 해결될 수 없는 불안을 인식한다면 왜곡된 인지로 해결가능한 문제만 인식한다는 것을 알려줘. 그렇기에 본질적 불안을 포용하는 것이 최고의 지식이야.